우리 아버지는 왜 남로당원이 되었을까?
일생을 다 바쳐 본 공산주의를 놓고 부친은 한마디로 말씀하신다. <정치는 최대의 협잡이야!>.
이민복(대북 풍선단장)
탈북자로서 선산을 벌초하였다고 하니 의문스러워 묻는 분들이 있다. 부친은 남한 출신이다.
북한은 8.15 해방 다음해부터 적화통일을 위해 대남공작원을 파견하였다. 부친의 고향인(전북) 익산지구에 중앙당이 파견한 공작원은 팔로군 출신 김복동이었다고 한다. 6.25 때 인민군으로 편입된 팔로군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전에 벌써 공작 차원에서 활약하였다는 것이 새롭다.
세계 공산화의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때가 2차대전 전후라고 본다. 스페인 내전, 그리스 내전, 중국, 한국의 내전 등으로 증명된다. 이러한 공산화의 신념을 가진 자가 아버지를 포섭한 것이다.
아버지는 감수성이 예민한 20살 전야였다. 또 마을에서 면장감은 누구라고 할 정도로 영특하였다고 한다. 또 5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공부를 하였다. 그렇다고 왜 하필 공산당이었는가가 의문이다.
그 이유는 생전 나에게 한 말씀과 한편 남한의 전 부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을에 차씨의 세도가 셌다고 한다. 실제로 탈북하여 부친 고향에 가보니 그랬다. 소학교에 가려면 차씨네 땅을 밟아야 하는데 못 가게 하여 한참 에돌아 다녔다고 한다.
한번은 차씨네가 우리 땅을 다니려면 연설을 해보라고 시켜 멋들어지게 하니 그제야 너만 다니라고 해 겨우 다녔다고 한다. 이것이 어린 마음에 못이 박힌 것이다. 또 하나 못이 박인 것이 있다. 그것은 형님 중에 맏형이 땅도 많고 가장 잘 살았는데 가난하기 그지없는 동생들에게 땅 <한마지기> 지어먹으라고 하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이러한 불만들은 공산주의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승화되었다. 산이 없는 호남평야 고향지구이니 공동무덤 속을 아지트로 지하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얼마나 부친의 조직이 활성화되었나 하는 것은 전 부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 부친의 눈짓 하나이면 일사불란하게 마을이 움직였다고 한다.
6.25 전쟁으로 인민군이 들어오자 세상 밖으로 나온 부친은 익산군당 선전비서로서 짚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때 가장 잘한 것 하나가 있다. 이 지역에서 학살이 없는 것이다. 머슴들이 부자들을 죽이자고 할 때 <마을사람을 죽이는 것은 네 가족을 죽이는 것과 같다. 그런 호미질은 우리(당 간부)가 하겠으니 나누어 준 땅에서 농사나 열심히 하라>며 가로 막았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 부자들이 공산당 간부인 부친 집에 숨어 기거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남한 전 부인 증언).
안개가 자욱한 참 미묘한 기운이 도는 1950년 9월13일, 마을마다 걸려있던 공산당 구호들이 내려지는 속에 밖에만 나돌던 남편이 집에 들어왔다. 절구질하는 부인을 대신하면서 잠시 친정집에 젖먹이 딸을 데리고 가 있다 오라고 한다. 파릿한 얼굴에 입술은 떨렸고 헛 절구질로 낟알이 훝어뜨리군 한다. 그 뒤로 영영 남편을 보지 못하였다.
전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부자들이 남편을 보증하겠으니 가지 말라고 해도 신념을 따라 북으로 갔다고 한다. 학살이 없어서인지 마을사람 중에서 해코지하는 이는 없었는데 타지방에서 온 이가 공산당 간부 여편네라는 이유 하나로 죽이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는 온 마을사람이 나서 저 여편네는 정치를 모르는 아낙네에 불과하다며 극구 보호하여 살아났다고 한다.
부친은 남로당원들을 이끌고 후퇴하는 인민군 6사와 함께 태백산맥을 따라 자강도 희천, 강계까지 갔다고 한다. 처음 인민군은 자신들을 믿지 못해 대열에 들여놓지 않았는데 그래도 따라오니 부상병 군관을 들것에 메고 가는 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맨 몸으로도 힘든 행군길에 이처럼 고역은 없었다고 한다. 사선을 넘고 넘어 찾아간 희망의 등대 북한공산주의!
나는 과학원 연구원으로 밤 1시 정도에 퇴근하는 일이 잦았다. 집으로 가는 퇴근길은 논판을 지나는 길이었는데 이 고요한 한밤중에 통곡소리가 난다. 놀라 달려가 보니 부친이었다. 인생의 허무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허무는 부친에게 더 심한 것 같았다. 일생을 다 바쳐 본 공산주의를 놓고 부친은 한마디로 말씀하신다. <정치는 최대의 협잡이야.>
아들인 나도 그런 공산주의 속에 자랐기에 이를 다듬어 다음과 같이 결론한다.
<사회주의는 사기주의!, 공산주의는 공상주의!>
부친이 그토록 공산화하려 했던 고향의 현 모습은 어떨까. 선산을 가꾸려고 어둠 속 새벽길을 걸어보니 마을마다 보이는 것은 십자가 등이다. 호남평야이니 먼 곳의 마을들이 사방 다 보인다. 유난히 이 지역은 교회가 많아 마을마다 있다. 부친 고향마을의 교회도 친척가문이 세웠다. 김일성은 <쌀은 공산주의!>라고 했다. 최소한 부친의 고향은 쌀은 넘친다. 이게 현실 공산주의였다.
북한은 8.15 해방 다음해부터 적화통일을 위해 대남공작원을 파견하였다. 부친의 고향인(전북) 익산지구에 중앙당이 파견한 공작원은 팔로군 출신 김복동이었다고 한다. 6.25 때 인민군으로 편입된 팔로군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전에 벌써 공작 차원에서 활약하였다는 것이 새롭다.
세계 공산화의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때가 2차대전 전후라고 본다. 스페인 내전, 그리스 내전, 중국, 한국의 내전 등으로 증명된다. 이러한 공산화의 신념을 가진 자가 아버지를 포섭한 것이다.
아버지는 감수성이 예민한 20살 전야였다. 또 마을에서 면장감은 누구라고 할 정도로 영특하였다고 한다. 또 5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공부를 하였다. 그렇다고 왜 하필 공산당이었는가가 의문이다.
그 이유는 생전 나에게 한 말씀과 한편 남한의 전 부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을에 차씨의 세도가 셌다고 한다. 실제로 탈북하여 부친 고향에 가보니 그랬다. 소학교에 가려면 차씨네 땅을 밟아야 하는데 못 가게 하여 한참 에돌아 다녔다고 한다.
한번은 차씨네가 우리 땅을 다니려면 연설을 해보라고 시켜 멋들어지게 하니 그제야 너만 다니라고 해 겨우 다녔다고 한다. 이것이 어린 마음에 못이 박힌 것이다. 또 하나 못이 박인 것이 있다. 그것은 형님 중에 맏형이 땅도 많고 가장 잘 살았는데 가난하기 그지없는 동생들에게 땅 <한마지기> 지어먹으라고 하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이러한 불만들은 공산주의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승화되었다. 산이 없는 호남평야 고향지구이니 공동무덤 속을 아지트로 지하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얼마나 부친의 조직이 활성화되었나 하는 것은 전 부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 부친의 눈짓 하나이면 일사불란하게 마을이 움직였다고 한다.
6.25 전쟁으로 인민군이 들어오자 세상 밖으로 나온 부친은 익산군당 선전비서로서 짚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때 가장 잘한 것 하나가 있다. 이 지역에서 학살이 없는 것이다. 머슴들이 부자들을 죽이자고 할 때 <마을사람을 죽이는 것은 네 가족을 죽이는 것과 같다. 그런 호미질은 우리(당 간부)가 하겠으니 나누어 준 땅에서 농사나 열심히 하라>며 가로 막았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 부자들이 공산당 간부인 부친 집에 숨어 기거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남한 전 부인 증언).
안개가 자욱한 참 미묘한 기운이 도는 1950년 9월13일, 마을마다 걸려있던 공산당 구호들이 내려지는 속에 밖에만 나돌던 남편이 집에 들어왔다. 절구질하는 부인을 대신하면서 잠시 친정집에 젖먹이 딸을 데리고 가 있다 오라고 한다. 파릿한 얼굴에 입술은 떨렸고 헛 절구질로 낟알이 훝어뜨리군 한다. 그 뒤로 영영 남편을 보지 못하였다.
전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부자들이 남편을 보증하겠으니 가지 말라고 해도 신념을 따라 북으로 갔다고 한다. 학살이 없어서인지 마을사람 중에서 해코지하는 이는 없었는데 타지방에서 온 이가 공산당 간부 여편네라는 이유 하나로 죽이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는 온 마을사람이 나서 저 여편네는 정치를 모르는 아낙네에 불과하다며 극구 보호하여 살아났다고 한다.
부친은 남로당원들을 이끌고 후퇴하는 인민군 6사와 함께 태백산맥을 따라 자강도 희천, 강계까지 갔다고 한다. 처음 인민군은 자신들을 믿지 못해 대열에 들여놓지 않았는데 그래도 따라오니 부상병 군관을 들것에 메고 가는 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맨 몸으로도 힘든 행군길에 이처럼 고역은 없었다고 한다. 사선을 넘고 넘어 찾아간 희망의 등대 북한공산주의!
나는 과학원 연구원으로 밤 1시 정도에 퇴근하는 일이 잦았다. 집으로 가는 퇴근길은 논판을 지나는 길이었는데 이 고요한 한밤중에 통곡소리가 난다. 놀라 달려가 보니 부친이었다. 인생의 허무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허무는 부친에게 더 심한 것 같았다. 일생을 다 바쳐 본 공산주의를 놓고 부친은 한마디로 말씀하신다. <정치는 최대의 협잡이야.>
아들인 나도 그런 공산주의 속에 자랐기에 이를 다듬어 다음과 같이 결론한다.
<사회주의는 사기주의!, 공산주의는 공상주의!>
부친이 그토록 공산화하려 했던 고향의 현 모습은 어떨까. 선산을 가꾸려고 어둠 속 새벽길을 걸어보니 마을마다 보이는 것은 십자가 등이다. 호남평야이니 먼 곳의 마을들이 사방 다 보인다. 유난히 이 지역은 교회가 많아 마을마다 있다. 부친 고향마을의 교회도 친척가문이 세웠다. 김일성은 <쌀은 공산주의!>라고 했다. 최소한 부친의 고향은 쌀은 넘친다. 이게 현실 공산주의였다.
[출처] 우리 아버지는 왜 남로당원이 되었을까?|작성자 kimhs2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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